제가 스물여섯살 때의 일인데요, 그때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작은 광고회사에서 매일 이게 내가 원했던 일인가? 고민을 하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 퇴사를 했던 때였어요. 건대에 있는 반지하에 살았는데 여름이 되니 바퀴벌레가 매일매일 나타나더라고요. 어느 날인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밤중에 집을 뛰쳐나와 강남에 있는 여성전용 사우나에서 잤어요. 자려고 하는데 도저히 잠이 안 오더라고요. 돈도 없고, 집에는 바퀴벌레가 나오고, 꿈꿔왔던 광고일은 생각과는 달랐고, 난 대체 혼자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건지, 당장 내일도 뭘 해야할지 모르겠는 거 있죠. 그냥 한없이 막막했습니다. 그런 밤을 지새우고, 아침에 사우나를 나와 무작정 역삼역쪽 대로변을 통해서 걸어갔습니다. 역삼역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언주역 어떻게 가요?”하는 거예요. 외국인이더라고요. 저도 언주역이 어디인지 잘 몰라서, 네이버 지도를 켜고 언주역 방향을 알려주었습니다. 마침 가려던 방향이랑 비슷하더라고요. 역삼역 사거리 신호등이 유독 참 길어서, 그 친구에게 네이버 지도 사용법까지 대강 알려줄 수 있었어요. 이후에 B와는 종종 만나서 밥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사이가 되었고요.
B는 프랑스와 중국, 한국을 오가면서 일하는 디자이너였는데요, 프랑스에서 20살부터 회계쪽으로 일을 했대요. 그렇게 5년 정도 하고 나니까 너무 지루하고 매일 똑같은 일상을 견딜 수 없어져서 독학으로 디자인 공부를 했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고요. 힘들 때도 있지만 지금이 너무 즐겁고 일이 재밌다고 했어요. 주변에서 말했던 것처럼 안정적인 회계 일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지금만큼 행복하긴 어려웠을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제게도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해”라고 말하는 거 있죠. 자기가 응원한다고요. 저는 대학을 나와서, 취업을 하고, 커리어를 쌓으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는데, 회사에서 하나도 즐겁지 않은 표정으로 일하고, 매일매일 퇴사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이 봤는데, 네 나이면 어리지도 않으니 이제 안정적인 직장을 찾아서 오래 일하고 돈을 모아서 시집가라는 사람들은 많이 봤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어요. 와,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이렇게도 살 수 있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나를 응원해주네? 신세계였어요.
그리고 지금 한 벌써 5년도 넘는 시간이 흘렀는데요, 이상하게 이 만남은 지워지지가 않고 계속 기억이 나요. 실제로 이 이후로 유학 준비를 했었거든요, 물론 못 갔지만요. 그래서 실은 시간을 낭비했다고 후회하고 B를 욕한 적도 있어요, 아, 괜한 뽐뿌를 넣어가지고! 하면서요. 그런데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시간들이 없었으면 안 됐을거란 생각이 드는거죠. B는 내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세상을, 삶의 방식을 보여준 거예요. 내가 아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란 걸 처음으로 알려준 사람인거죠. 어쩌면 그때의 만남은 제 좁은 세상이 처음으로 깨진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물론 꼭 좋아하는 일을 해야하고, 그렇지 못한 삶은 불행하다고 말하고 싶은건 절대로 아니에요. 다만,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삶과 상상했던 삶 말고도, 세상에는 다양한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꼭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고등학교와 대학시절 내내 직업이 공무원과 대기업에만 있는 줄 알았거든요. 광고회사가 무슨 일을 하는 건지도 모르면서, 멋있어보이니까 광고회사에 들어가서 커리어를 쌓고, 돈도 많이 벌어야지! 하는수준이었단 말이예요. 그게 가장 좋고, 이상적인 삶인 줄 알았어요. 저는 B를 만나서, 처음으로 내가 예상했던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을 만났던 거예요.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세상이 다가 아니었네? 그뒤에 훨씬 넓은 어떤 세상이 있었네? 하는 어떤 깨달음이요.
그래서 여러분에게 평소에 마주칠 일 없는, 마주치더라도 사적인 이야기를 하기는 어려운 멘토들을 만날 수있도록 하고 싶었어요. 저는 아무런 의도가 없는 우연한 만남이 주는 힘이 강력할 수 있다고 믿거든요. 취업을 하기 위한 만남은 이미 너무 많잖아요. 가끔은 우연한, 목적 없는 만남이 생각지도 못한 길로 이끄는 거잖아요. 그리고 저는 그런 경험이, 학교를 떠나 사회로 진입하는 시기인 청년들에게 가능한 많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와 다른 삶의 방식을 살아온 삶의 선배들을 우연히 마주칠 수 있는 경험을 얻어가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 평소 가지 않던 길로 가는 것
- 내가 만날 일이 없던 사람을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것
- 의도하지 않은 만남들이 주는 것, 내가 모르는 세상을 만나는 일
- 내가 살아온, 살고있는, 살거라고 예상했던 삶 말고도 다른 삶들이 세상에는 많이 존재한다는 것
- 내가 꿈이라고 여겼던, 혹은 있는 줄도 몰랐던 삶을 누군가는 살고 있다는 것
- 그리고 세상의 누군가는, 반드시 나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깨닫는 경험
저는 여러분들이 잠깐 멘토링을 했다고 해서 원하는 기업에 취업하거나, 평생의 멘토를 찾는다거나, 대단한 깨달음을 얻는다거나, 인생의 방향을 단번에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랬으면 지금 저는 제주도가 아니고 프랑스 아를의 아를 국립 사진학교에 있어야겠죠, 허허. 하지만 분명한 건, 그렇다고 해서 B와의 만남이 제게 의미 없었던 일은 아니라는 점이에요. 당시에는 이게 무슨 소용이 있어? 싶었던 일과 경험들이, 결국에는 쌓이고 쌓여서 지금의 나를 만드는 거니까요. 광고회사에서 일하다 퇴사한 나, 좋아하는 일을 찾기로 결심했던 나, 결국 그 일을 포기한 나, 모든 선택이 나를 이루는 거니까요. 그건 절대로 없어지지 않고 내 안에 남아있어요. 저는 2016년 여름, 역삼역 사거리에서 작은 씨앗을 심은 거라고 말하고 싶어요. 여러분이 업토링에서 겪은 만남과 경험이 지금은 쓸모없어 보일 수 있어도, 정말로 쓸모없는지는 지금 여러분이 심은 씨앗이 싹틔우나서야 알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여러분이 앞으로 어떤 만남과, 모험과, 시련을 겪더라도 그것들이 다 의미없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취업을 준비하시면서, 심지어는 취업을 하고나서도 힘든 일이 많으실 거예요. 그리고 힘든 일이 많은만큼, 딱 그만큼 좋은 일도 많을 거고요. 여러분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요, 또 그만큼 여러분을 좋아하고 지지해주는 분들도 생길 거예요. 여기 있는 저희들과 멘토분들도 전부 여러분을 돕고 지지하고 싶어서 와주신 거니까요. 생각보다 세상에는 여러분을 돕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꼭 기억해주세요. 고맙습니다.